[스크랩] 비운의 복싱천재 - 살바도르 산체스
살바도르 산체스
교통사고,천재복서 가다
1982년 8월 12일, 멕시코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비보(悲報)는 전 세계 복싱팬들을 충격과 슬픔에 빠트린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像)을 연상시키는 매끈한 얼굴과 몸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출중한 기량으로 페더급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산체스가 그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살바도르·산체스의 죽음. 그것은 단순한 충격을 넘어 세계 복싱계의 큰 손실이었다. 에우제비오·페드로사와의 통합전, 그리고 알렉시스·아르게요에의 도전 등 엄청난 흥행 빅카드가 가시화되고 있었고, 또 산체스가 더욱 성장이 가능한 23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20여일 전 아주마·넬슨과의 경기에서 만개한 기량을 펼쳐 보였던 그이기에 팬들의 비통함은 더했다.
1959년 2월 멕시코의 산티아고 티안키스텐코에서 태어난 살바도르·산체스는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소년 산체스는 책읽기를 즐기고 사춘기가 될 때까진 그 흔한 주먹다짐 한번 하지 않았을 정도로 얌전한 아이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해 장차 의사가 될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복싱에 관심을 갖게 된 중학교 시절부터. 급우들이 몸집이 작은데다 얌전하고 핸섬한 그를 '계집애'라고 놀려대기 시작했고, 이에 격분한 산체스가 덤벼들었다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일이 반복됐다.
무너진 자존심을 되찾고자 마음먹은 산체스는 복싱체육관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링에서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게 된다. 내친김에 복서로서의 인생을 선택하기로 한 산체스는 집안의 반대를 묵살하고 아마튜어 선수로 활동, 14연승의 기록을 간직한 채 1975년 5월 프로로 전향한다. 그의 나이 16세. 데뷔전에서 KO승을 거둔 산체스는 더욱 고삐를 당겨 데뷔 3년째인 1977년 5월까지 18연승 17KO를 거두는 쾌조의 순항을 거듭한다.
페더급, 산체스의 시대 열리다
1977년 9월 9일, 산체스는 공석인 멕시코 밴텀급 타이틀을 놓고 안토니오·베체라와 벌인 결정전에서 적지의 텃세에 밀려 유일한 1패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이후 두 번의 재기전을 무난히 치른 후 페더급으로 월장한다.
체급을 옮겨 맞은 첫 경기는 산체스의 미국 무대 데뷔전. 1978년 4월 15일 L.A.의 올림픽 대강당에서 열린 시합에서 산체스는 다시 큰 고비를 맞는다. 상대인 후안·에스코바르는 10전 8승 중 6KO라는 펀치력 외에 크게 주의할 것이 없는 무명복서였고, 그나마 2패는 모두 KO로 당한 것이어서 산체스의 낙승이 예상됐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산체스는 두 번이나 다운을 당하는 핀치에 몰리다 후반 난타전에서 겨우 점수를 만회해 무승부를 이끌어 내는데 만족해야 했다. 대 에스코바르 전은 산체스 스스로 "복싱 이력 중 가장 유감없는 일전"으로 회상했던 시합이다.
두번의 힘겨운 시련을 거친 산체스는 이후 기량이 급성장, 1980년 2월 대니·로페스에 도전하기 전까지 파죽의 14연승을 거두며 페더급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다.
WBC 페더급 타이틀을 놓고 대니·로페스와 펼친 일전은 산체스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선언식'이었다. 70년대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KO아티스트 대니·로페스는 KO왕의 원조격인 루벤·올리바레스를 꺾고 왕좌에 오른 데이빗·코테이를 적지에서 잡고 타이틀을 차지한 후, 총 8번의 방어전 중 7번을 KO로 장식한 부동의 페더급 제왕이었다. 또한 단순한 공격 패턴과 기량 탓에 숱한 경기에서 선제 다운을 당하고도 묵묵히 전진에만 골몰하는 파이팅으로 곧잘 역전 KO를 이끌어 내는 인기복서였다.
경기 전 예상 역시 로페스의 일방적인 낙승이 지배적이었으며, 영리한 복싱을 구사하는 산체스도 판정까지가 한계라는 전망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21살의 싱싱한 멕시칸은 세간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듯 1회전부터 줄기차게 챔피언의 전신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산체스의 한 박자 빠른 발놀림에 원투와 짧은 어퍼로 이어지는 컴비네이션, 그리고 상대의 공격루트를 앞서가는 회피와 커버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결과론이지만 위빙이나 더킹이 좋은 것도 아니며, 커버링이 두텁지도 않고 그렇다고 풋윅이 경쾌하지도 않았던 로페스는 애초 산체스가 상대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었다. 로페스는 다양한 각도에서 쉴 새없이 터져 나오는 산체스의 컴비네이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고, 산체스가 완전히 자신감을 얻은 10R 이후의 양상은 차라리 '매타작'에 가까웠다. 이 시합의 최종회가 된 13회 초반, 그나마 뚝심으로 버티던 로페스가 도전자의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맞고 급격히 중심을 잃자, 주심이 산체스를 뜯어말리며 게임종료를 선언한다. 새로운 페더급 왕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고메즈를 날리고 최고의 복서로
2개월 후 루벤·카스티요와의 1차 방어전을 3대0 전원일치 판정으로 통과한 산체스는 2차 방어전 상대로 다시 로페스와 조우한다.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에서 열린 이 시합은 최종회만 13R에서 14R로 바뀌었을 뿐 1차전의 재방송이나 다름없는 내용으로, 특별한 기술과 요령이 없는 로페스 스타일이 산체스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임을 재확인한 경기였다.
3차 방어전 상대는 가이아나 출신의 신예 패트릭·포드. 이 시합에서 산체스는 장신의 아웃복서 포드의 스피드를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내내 고전하지만, 타고난 임기응변과 방어력에 힘입어 신승을 거둔다. 또한 4차 방어전 후안·라포르테와의 시합에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고메스와의 일전을 앞두게 된다. 당시 고메스는 사라테와의 6차 방어전을 포함 13차례의 전 방어전을 모두 KO로 장식한 상태. 게다가 33전 32승 32KO 1무라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전적으로 포장돼 있었다.
운명의 1981년 8월 21일, 서로의 승리를 호언하던 두 사내가 라스베가스에서 격돌한다. 결과적으로 이 대결은 살바도르·산체스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진정한 '스타'임을 확인시켜준 시합이다.
1회 공이 울리자 산체스는 당초 아웃복싱을 하리라던 예상을 깨고 근소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주먹을 유도한다. 경기 시작 40여 초가 경과하자 고메스는 여지 없이 산체스를 로프 쪽으로 몰아 갔고 막 연타를 휘두르려는 순간, 산체스의 레프트훅이 고메스의 턱에 작렬한다. 링사이드가 열광하는 가운데 복싱 이력 최초의 다운을 당한 고메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승기를 잡은 산체스는 맹공을 가했고, 서로의 주먹이 교차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놀라운 적중률로 고메스를 그로기로 몰아넣었다. 심신을 수습하지 못한 고메스는 10여초 후 중립코너 쪽에서 다리가 꺾이는 아찔한 상황까지 연출하며 일방적으로 난타당한다. 이 1회전의 공방이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다. 큰 폭풍을 겪은 고메스는 다리가 많이 풀려 이후 라운드에서도 특유의 파워를 보여주지 못했고, 겨우 회복되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산체스의 기습공격이나 카운터를 허용해 점수를 잃는다.
운명의 8회전, 앞의 7회전에서 고메스의 분전에 잠시 주춤했던 산체스가 역공에 나선다.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꾼 산체스가 레프트어퍼를 시작으로 연타를 퍼붓기 시작하자 고메스 역시 이에 질세라 반격을 가한다. 숨가쁜 교전 중 두 남자의 모션이 일시정지 되는 순간, 그야말로 '그림같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고메스의 턱을 강타한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던 고메스는 이어 불어닥친 연타에 모로 쓰러지고, 우리에게도 낯익은 카를로스·파디야 주심은 고메스의 동공을 살핀 뒤 카운트를 중지하고 산체스의 승리를 선언한다. 팬들의 환호로 가득찬 경기장 한 가운데에서 무등을 타고 승리를 만끽하는 산체스와 실려가듯 자기 코너로 퇴장하는 고메스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경기 후 산체스는 "가능하면 15회까지 끌고 가서 고메스를 좀더 곯려주고 싶었다"고 사자후를 토했고, 고메스는 "나의 페더급 전향에 대한 의사는 변함이 없다"며 여운을 남겼다.
출중한 디펜스,그리고 콤비네이션
이후 산체스는 팻·카우델과의 7차 방어전과 호르헤·가르시아와의 8차 방어전을 각각 2대1 판정승과 2대0 판정승을 거두는 기복을 보여, 고메스 전의 승리 요인이 역시 스타일에 있음을 입증한다.
1982년 7월 21일 산체스는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된 9차 방어전에서 가나 출신의 신예 아주마·넬슨과 마주한다. 이 경기에서 산체스는 7R 선제 다운을 뺏은 이후부터는 오히려 도전자의 파이팅에 눌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최종 15R에서 얻은 찬스를 놓치지 않아 결국 극적인 TKO 승을 거둔다. 반면 놀라운 감투를 펼친 준 넬슨은 비록 패하긴 했어도 대기(大器)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인 경기였다.
그리고 정확히 22일 후 산체스는 애마인 흰색 포르셰와 함께 세상을 뜬다. 이틀 후 그의 고향 티안키스텐코에서는 유족과 복싱관계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리고 어느 복싱팬이 보내온 꽃다발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아디요스, 챔피언."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던 복싱왕국 멕시코 선수중에서도 산체스는 전 세계 복싱팬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고메스의 완력을 제어하는 신묘한 수비력과 접근전에서 터지는 환상적인 컴비네이션은 필자를 포함한 숱한 복싱 팬들에게 복싱이 신체를 이용한 가장 우아한 '종합예술'임을 가르쳐 주었고, 더불어 불치의 '산체스 병'을 선사했다.
세월이 흘러 그 극적인 죽음이 산체스의 실체를 부풀렸다는 지적도 있지만, 많은 팬들은 아직도 산체스가 보여주었던 섬세한 복싱의 매력을 곱씹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를 영원한 챔피언으로 기억할 것이다.
◀ 살바도르·산체스 전적표 ▶
'75 5. 4 알·가르데노 ○ KO 3R 벨라크루스
5.25 미구엘·오르티스 ○ KO 3R 미산틀라
8.10 빅토르·마르티네스 ○ KO 2R 미산틀라
10.19 세자르·로페스 ○ KO 4R 미산틀라
11.25 칸디도·산도발 ○ TKO 7R 멕시코시티
12.11 피델·트레호 ○ 판정 8R 멕시코시티
'76 1.24 후안·그라나도스 ○ TKO 3R 멕시코시티
2.25 하비에르·솔리스 ○ TKO 7R 멕시코시티
3.31 세라핀·파체코 ○ TKO 4R 멕시코시티
4.24 호세·챠베스 ○ TKO 7R 멕시코시티
5.26 피델·트레호 ○ KO 6R 멕시코시티
7. 5 페드로·산도발 ○ TKO 9R 멕시코시티
8.11 호엘·발데스 ○ TKO 9R 멕시코시티
10.31 사울·몬타나 ○ TKO 9R 누에보 라레도
12.25 안토니오·레온 ○ TKO 10R 멕시코시티
'77 2. 5 라울·로페스 ○ TKO 10R 멕시칼리
3.12 다니엘·펠리자르도 ○ KO 5R 멕시코시티
5.21 로살리오·바딜요 ○ TKO 5R 멕시코시티
9. 9 안토니오·베체라 ● 판정 12R 마사틀란
11.11 호세·소토 ○ 판정 10R 로스모치스
12. 5 엘리세오·코스메 ○ 판정 10R 멕시코시티
'78 4.15 후안·에스코바르 △ 무승부 10R 로스엔젤리스
7. 1 호세·산체스 ○ 판정 10R 멕시코시티
8.13 헥토르·코르테스 ○ TKO 7R 마사틀란
9.26 프란시스코·폰세 ○ KO 2R 휴스턴
11.21 에드윈·알라콘 ○ TKO 9R 샌안토니오
12.16 호세·산타나 ○ TKO 2R 멕시코시티
'79 2. 3 카를로스·미밀라 ○ KO 3R 멕시코시티
3.13 제임스·마르티네스 ○ 판정 10R 샌안토니오
5.19 살바도르·토레스 ○ TKO 7R 멕시코시티
6.17 펠·클레멘테 ○ 판정 12R 샌안토니오
7.22 로살리오·무로 ○ KO 3R 샌루이스 포토시
8. 7 펠릭스·트리니다드 ○ TKO 5R 휴스턴
9.25 라처드·로젤 ○ KO 3R 로스엔젤리스
12.15 라파엘·간다릴라 ○ TKO 5R 과달라하라
'80 2. 2 대니·로페스 ○ TKO 13R 피닉스
<WBC 페더급 타이틀 획득>
4.12 루벤·카스티요 ○ 판정 15R 턱산
<WBC 페더급 1차 방어>
6.21 대니·로페스 ○ TKO 14R 라스베가스
<WBC 페더급 2차 방어>
9.13 패트릭·포드 ○ 판정 15R 샌안토니오
<WBC 페더급 3차 방어>
12.13 후안·라포르테 ○ 판정 15R 엘파소
<WBC 페더급 4차 방어>
'81 3.22 로베르토·카스타논 ○ TKO 10R 라스베가스
<WBC 페더급 5차 방어>
7.11 니키·페레스 ○ 판정 10R 로스엔젤리스
8.21 윌프레도·고메스 ○ TKO 8R 라스베가스
<WBC 페더급 6차 방어>
12.12 팻·카우델 ○ 판정 15R 휴스턴
<WBC 페더급 7차 방어>
'82 5. 8 호르헤·가르시아 ○ 판정 15R 댈러스
<WBC 페더급 8차 방어>
7.21 아주마·넬슨 ○ TKO 15R 뉴욕 MSG
<WBC 페더급 9차 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