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975년 태국으로 부터의 센세이션
생각이, 의견이나 주장이 같고 틀리고를 떠나서 요즘 보여지는 최용수 선수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과 지지가 열렬하고 또한 폭넓다는 생각입니다. 기분좋은 현상 아니겠습니까, 비록 이번 마사토전에 대한 이견으로 격토방 사용자들사이에 논의의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만 이 대결구도는 흔히 말하는 빠와 까의 대립이 아닌 호의적 빠와 비판적 빠 사이의 견해차로부터 비롯된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최용수의 승리를 염원하는것은 모두 마찬가지인듯 하다고 보면 이 주제하의 과격한 충돌은 어색하다는 생각이들구요…
혜성같이 등장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려하시는 한 유저님의 게시물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호기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당당함이 제가 보기엔 멋졌습니다만, 저와는 생각이 다르신 분들도 많더군요. 한동안 이어졌던 의견의 난무를 감상하면서 모처럼 되돌아온 격토방의 활력에 기쁜마음이 앞섰지만 그 유저님의 돌아선 뒷모습엔 암담할 뿐입니다. 그것은 올 2월말부터 지금까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제가 몇번씩이나 목격해야 했던 그런 뒷모습입니다, 각각 해박한 지식과 냉철한 논리, 폭주하는 열정으로 제 기억속에 남은 HUGO BOSS님, 깨달은자님, 그리고 발도제……
글이라는건 잘 쓰는것이 은이요, 바르게 읽는것이야 말로 금이다 라고 하면 어떠실지… 행간을 읽고, 어조에 유의하면 글쓴이의 의도가 보이고 그 감정이 들리는것 아니겠습니까, ‘최용수는 마사토를 절대 이길 수 없다’ 라는 언급을 명제로 규정하고 학술적으로 판단하자면 거짓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표현의 방식으로, 수사의 일종으로 본다면 나름대로 호기가 방장하고 꽤 매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러한 부분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눠본다면 한쪽은 융통성없이 고지식한, 남산의 딸각발이 선비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인간형이 되겠고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뒤틀어 읽는 습성을 가진 냉소적인 의뭉꾼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사실은 다 알면서 짐짓 모르는척 집요하게 괴롭히죠..이런분들은…. 쓰다보니까 다른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는겁니다., 제가 옳다거나 그런분들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님을 재삼 강조드리구요….끝으로 자신의 실수 혹은 오류를 인정하고 그것을 정정한 후 물러나시는 닌자애비님의 방식에 마음속으로 나마 힘껏 박수를 쳐 보면서, 본론 들어갑니다.
70년대 초반 태국을 방문했던 WBC의 커미셔너 호세 슐레이만 박사는 무에타이의 시합을 관전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정상급 낙무아이들이라면 복싱의 링에서도 당장 세계랭커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후 WBC는 룸피니와 라자담넌의 챔피언이 복싱으로 전향할때 세계랭킹 10위권을 보장하는. ‘특별한 예우’로 무에타이를 대하게 된다. 남북 아메리카의 복싱계는 그러나 슐레이만의 이러한 행보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복싱계 인사들의 유서깊은 보수성향이라는 골격에 무에타이에 대한 인식의 총체적 부재가 틀을 잡고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살이 더해진 뒤 복싱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으로 마무리 되어 출현한 여론이라는 이름의 괴수는 슐레이만과 WBC를 코너로 몰아넣었다.
1950년 타이의 펫챠분에서 사엔삭 무앙수린은 태어났다. 60년대 말 태국의 평균치를 크게 상회하는 체구의 그는 격투의 성지 룸피니의 링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65전 59승 6패 55 KO 낙무아이의 치고는 비상식적인 KO율을 기록하며 태국의 국민적 스타로 자리잡은 무앙수린이었지만 도박이 성립해야 재미를 보는 무에타이 프로모터들에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체급상 원래 상대를 구하기 힘들었던 그였다. 그리고 흥행사들의 노골적인 경원과 맞닥드린 무앙수린은 미련없이 그 눈길을 세계로 돌렸다.
슐레이만의 약속대로 세계랭킹으로 데뷰한 그는 20전(12승8패)의 전적을 가진 루디 배로를 방콕으로 불러들여 전무후무할 10라운드의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자국민들의 광적인 지지에 무앙수린은 상대를 첫라운드에 때려잡으며 부응했고 두번째 시합에서는 베테랑 세계랭커(41전 31승 3무 7패) 라이온 후루야마를 7회에 박살낸다. 단 2전의 경력만으로 무앙수린은 세계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잡게되었는데 서구의 복싱팬들과 전문가들은 이것을 넌센스로 규정했고 무앙수린에 대한 냉소적인 혹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이 느린 왼손잡이에 오른손을 무척 지저분하게 사용했던, 그리고 일발의 왼손 강타에 의존한 그의 스타일은 미국인들의 복싱 미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에대한 혐오와 조롱을 여과없이 배설하던 여론의 1975년, 분송 마스리(무앙수린의 다른이름)는 그러나 챔피언 페리코 페르난데즈를 8회에 스탑시켜버렸고 세계는 경악했다.
세상사라는것이 알고보면 다 그렇지만 특히 스포츠의 무대에선 공식이 부정되고 파괴된 상식이 파편으로 흩어지는것, 32년전의 태국발 센세이션은 킥복서(낙무아이)에 의한 복싱으로의 정벌이었다, 그리고 지금 최용수 선수는 킥복싱에 선전을 포고하며 무앙수린의 침공경로를 역으로 거슬러 진군한다.
덧붙임: 시엔삭 무앙수린의 이야기는 '규'님께서 화두를 주셔서 하게된것입니다. 규님은 중국에서 달러를 긁어모으시고 계신다고 합니다. 멋진 남자입니다.